남들이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순간이나 감정을 일시 정시시켜 기록해주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평범해 대수롭지 않아 했던 기억을 그림으로 재구성해 보여줬을 때 공감하며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담고자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도 사소한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림이 단순히 좋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재미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가가 되려고 합니다.
빼곡한 활자를 눈으로 쫓다가도 책 안에 담긴 삽화 한 장이 막연히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우울함에 대처하는 법’ 시리즈를 시작으로 많은 일러스트 작업을 해온 백두리 작가는 그림 그리기라는 방법을 통해 복잡한 감정을 차분하게 풀어나간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술잔을 기울이듯 그림 속 이야기에 공감하고, 마음을 기울인다.
석양 – 낮을 앞에 안고 밤을 등에 지고, 38 x 27cm, acrylic on paper. 2012
고무줄 놀이, 38 x 27cm, Acrylics on paper. 2012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시작했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특별한 계기 없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림이 좋았고 계속 그림은 함께 했습니다.작가가 되기로 한 것은 ‘우울함에 대처하는 법’ 시리즈를 그리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저도 우울함에 힘들어하던 시기를 보냈고 친구가 우울증으로 자살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림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그림이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다가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의 소재와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으시나요?
메시지가 있거나 어떤 상황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복잡한 이야기가 담긴 것처럼 보이곤 합니다. 그림의 소재는 대부분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얻습니다. 오히려 여행을 간다거나 특별한 경험을 했을 때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낼 때 소재가 떠오릅니다. 매일 똑같은 밥그릇이, 습관적으로 마시던 맥주가 어떤 날은 특별한 감정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를 그림에 담곤 합니다. 평소에 작은 것도 관찰하고 감정을 살피려고 노력합니다.
그림체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왠지모르게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예전 작업과 비교했을 때 그림체가 많이 변했는지,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나 항상 변함없이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림체는 조금씩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몸을 많이 크고 부풀려 그렸는데 지금은 정상의 몸 상태로 많이 돌아왔고, 색감도 예전에는 파스텔계열이나 부드러운 톤을 많이 사용했다면 지금은 좀 더 강하고 진한 색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기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듯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인물의 무표정은 쉽게 바뀌지 않네요.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많습니다. 마티스, 마그리트, 프리다 칼로, 보테로, 고갱, 루소 등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 느낌이 뒤섞여 표현되는 듯합니다. 그림의 주제는 일상의 소소한 감정이나 사람과의 관계에 항상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그림일기로 기록하게 되었고, 곧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작업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그림이 있다면요?
두 달 전쯤 출간한 정이현의<말하자면 좋은 사람>에 실린 그림들입니다. 그 책 안에 22컷의 그림이 실렸는데 어느 하나에 특별히 애착이 간다기보다 그 책 전체에 애착에 갑니다. 4년 전 기획된 책으로 작가분의 사정상 프로젝트가 잠시 멈췄다가 올해 다시 진행하게 되어 마무리한 책입니다. 4년 전에 그린 그림과 지금 그린 그림이 반반씩 섞여 들어가게 됐는데요. 최근에 나머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경력이 별로 없을 때 그렸던 4년 전의 그림을 다시 꺼내보게 됐었습니다. 그때의 그림을 통해 초창기 풋풋하고 열정적이었던 마음가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른을 위한 소설에 표지뿐 아니라 내지 작업을 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현재의 감정과 맞물려 정말 즐겁게 작업한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도시 ‘서울‘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리고 서울에서 자주 즐겨가는 ‘나만의 장소‘는?
바삐 자기 갈 길을 찾아 일하러 떠나는 이들로 가득한 개미굴 같습니다. 지방의 작은 도시 출신이라서 어른이 된 후 서울에 살게 됐을 때 이곳의 모습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복잡함이 지금도 때론 두렵고 어지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열정적이고 활기찬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는 자유로움이 있는 홍대 앞을 좋아했는데 예전 느낌이 거의 사라져지고 획일화되서 안타깝습니다. 요즘은 작은 바, 디자이너 숍이 있는 상수동 당인리길을 자주 갑니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땐 바다 대신 가깝고 넓은 한강을 찾습니다.
Susan Kaiser Greenland “The Mindful Child”, Acrylics on paper. 2012
결혼적령기 처녀와 성혼준비단, 145 x 97cm, Acrylics on canva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