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지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오브제 텍스타일 디자이너다. 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우연히 규방공예 공방에 다니면서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에 매력을 느껴 명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건축과 공간의 형태를 직물로 표현하는 섬세함이 묻어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현지는 차곡차곡 쌓인 벽돌의 짜임, 타일의 패턴, 건물의 기둥과 창문, 지붕의 형태처럼 도시에서 마주치기 쉬운 건축 구조를 직물로 재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전통 명주는 반투명에 가까운 얇은 소재로, 무거운 건축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빛에 예민해 놓이는 공간에 따라 모습을 다르게 드러내기 때문에 형태와 색을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는 섬세한 재료이기도 하다. 명주는 어두울수록 빛을 많이 흡수해 가장 투명한 색이 되고, 밝은 색일수록 오히려 투명함은 덜하지만 소재의 결은 섬세하게 드러낸다. 작가의 작업에서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공간의 형태로 쌓아 올려진 건축물은 압착되고 비물질화되어 빛을 통과시킬 정도로 가벼운 명주에 담긴다.
01. 어떻게 처음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직접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회사에 다니면서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질 때쯤에 친구를 따라 규방공예 공방을 다니면서 손으로 직접 소재를 만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다시 빠져든 것 같아요.
이후에 다시 스위스로 가서 공부를 마치고 네덜란드로 와서 조금씩 제가 만든 작업을 보여주게 되었고 지금까지 작업이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02. 처음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단계부터 어떤 과정으로 작업이 완성되는지 궁금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공간과 구조에서 작업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요. 벽돌의 짜임, 타일의 패턴, 건물의 기둥과 창문, 지붕의 형태를 살펴보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인상적인 조합이나 구조를 보면 사진이나 스케치로 틈틈이 옮겨두곤 해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스케치를 좀 더 구체화하면서 종이를 이용해 간단한 목업을 만들어 보거나 3d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볼륨감을 확인해 봅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샘플도 만들어 보고, 형태에 어울리는 소재의 결, 투명도, 색감을 정하면서 작업을 만들어 갑니다.
03. 작업할 때 어떤 소재에서 영감을 얻나요? 어떤 형태의 공간에서 영감을 얻나요?
평면적인 요소에서 입체적인 요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와 구조를 이루는 것들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작고 기본적인 형태인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떤 구조와 공간을 만들어 내거나, 창문, 문, 지붕과 같은 요소들과 만나면서 벽돌의 짜임과 패턴이 달라지는 모습이 늘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런 조합들을 보면서 멋대로 잘라서 펼쳐보거나 재조합하는 상상을 통해 작업을 위한 재료들을 조금씩 쌓아갑니다.
04. 벽돌 시리즈에서 벽돌은 무거운 소재인 데 비해 천으로 표현한 벽돌은 매우 가벼운 질감입니다.
공간과 볼륨을 표현하는 데 천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건축적인 구조와 요소들은 실제로는 덩어리가 크고 무거운 존재들이지만 이와 대척점에 있는 가볍고 투명한 천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지점이 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손과 눈으로 섬세한 소재의 결과 촉감을 느낄 수 있고 한국 고유의 명주에서만 볼 수 있는, 누에고치가 만드는 불규칙하고 짜임이 마치 벽돌과 같은 건축 소재에서 보이는 거친 질감과 닮은 부분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05. 천을 사용해서 공간과 볼륨을 표현할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는지 궁금합니다.
반투명한 소재로 만들어진 구조와 형태는, 그 너머로 보이는 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간에 따라 빛이 지나가거나 빛을 담아내고, 또 공간을 투영하는 느낌이 달라지는데요. 같은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빛과 공간의 성격에 따라 작업의 물성이 달리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형태와 볼륨감마저도 달리 보이는 소재의 불규칙함이 다루기 어려운 부분일지라도, 재료와 형태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재밌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06. 작업에서 색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제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한국 고유의 반투명한 명주로, 반투명한 소재에 빛이 스며들어 만들어내는 색과 결이 형태에 따라 그려내는 다양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과정 중에 하나입니다.
색은 물성의 영역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요, 색상이 어두울수록 빛을 가장 많이 흡수하면서 가장 투명한 색상이 되고, 밝은 색상일수록 소재와 빛이 만났을 때 투명도는 약해지지만 섬세한 소재의 결이 더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재의 성격을 고려해서 형태와 구조에 따라 어울리는 색과 투명도를 선택해서 작업을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