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도시의 거리가 아닌, 텅-빈 풍경 속 혼자 덩그라니 놓인 네온사인 불빛이 어쩐지 낯설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그리스어로 ‘막다른 곳에 다다르다’를 의미하는 Aporia시리즈는, 프랑스 문학비평가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책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을 모티브로 시작된 작가 이정씨의 작업이다.
“너와 나 사이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 속에 되풀이 되는 언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시 속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네온사인을 보며 그 이면의 공허함과 쓸쓸함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단상’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스의 슬픔’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담화를 기호학자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정리해 놓은 도서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빠지면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고 어딘가에서 들어본 법한 진부한 사랑의 표현을 소비하면서 결국에는 그 대상이 아닌 ‘사랑한다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오고가는 사랑의 표현 속에서 아무리 절절했던 사랑의 대사도 그 진실성을 상실한다.
외국 생활을 통해 소통에 불편을 겪으며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된 작가 이정씨는 이런 사랑의 표현들이 오히려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터넷과 TV, 영화에서 쉽게 ‘사용되는’ 사랑의 언어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가령 구글에 I love you with all my heart를 검색하면 약 2백만 개의 결과가 나오는데 이렇게 ‘상투적인 표현’으로 전락되어버린 사랑의 언어를 작가 이정씨는 이름 모를 황량한 공간으로 데려간다.
“나는 완벽해 보이는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제멋대로 이루어진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처럼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풍경은 그 풍경 위에 입힐 스토리를 상상하게 된다.” 도시의 쓸쓸함을 상징하는 네온사인 불빛 –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통해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랑의 메세지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