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 조각만이 작품은 아니다. 보고 싶은 것은 모두 작품이다.
벽의 낙서도 회화이고 대지의 퍼짐도 회화이며 상상의 화면도 회화이다.
도시의 건물도 조각이고 산의 바위도 조각이며 문득 떠오른 관념도 조각이다.
– 여백의 예술
여백에 담겨 있는 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이자 너와 나 사이의 이야기다. ‘밀어내기’, ‘스며들기’, ‘껴안기’, ‘침묵’ 으로 명명되는 그의 회화와 조각들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맴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쏟아낸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 놓인 빈 공간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경상남도 하남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우환 작가는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2011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무한의 제시’라는 타이틀의 회고전을 치뤘다. 한국에서 미대를 다니던 그는 회화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후에 ‘시간의 여울’, ‘여백의 예술’ 등 그의 저서에 쓰인 글처럼 그 때의 공부가 미술가로써의 작업에 이론적 바탕이 된다. 그리고 1968년,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예술의 일부로써 받아들이는 ‘모노하’ 운동에 참여하면서 작가 개인의 인공적인 가공보다는 재료의 천성 그대로를 남겨두면서 공간 그리고 감상자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작품 활동을 펼친다.
‘커다란 돌이 유리에 부딛히면 자연스럽게 유리를 깨뜨린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작품속에서 그런 사실만을 보여주고 작가의 흔적은 미미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서도 안된다. 작가와 유리 돌 사이에 존재하는 그 미묘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할 줄 알아야만 하나의 작품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쇠 판은 자연철에서 가공되어 규격화 된 사물이다. 돌과 쇠 판 둘 다 자연에서 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전자는 길들여진 것이고 후자는 아직 야생인 것으로 쇠 판은 돌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것이다. 규격화된 쇠가 지니는 중립성은 자연으로의 길을 내어줌으로써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하나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