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 작가의 ‘바람의 풍경’은 발이라는 신체의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시작된다. 비닐을 직접 손으로 잘라 확대되고 변형된 형태를 작가는 ‘쌓는다’는 행위를 통해 추상적인 내면의 풍경을 구성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래 알갱이가 축적되어 거대한 풍경을 이루듯, 손으로 하나씩 쌓아올려진 풍경은 무한하게 연속되는 시간과 힘을 담고 있다.
“김윤수는 주변의 일상적인 기물, 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신체에서 작업의 단초를 발견한다. 물건을 골판지 띠로 감아나가거나 실제 인물의 발을 비닐에 오린 다음 그것을 물결처럼 반복적으로 확대해가는 작업은 모두 구체적인 대상의 형태를 무수한 반복으로 지워나가는 과정인데, 구체적이었던 시작점에 비해 확장된 파문에서는 구체적인 실체가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을 뿐이다.” – 권영진 (미술사)
“매우 단순화된 형태와 단순반복적인 작업의 태도는 미니멀적이지만 그 역시 무수한 반복의 과정에 이루어지는 수양적 태도를 드러낸다. 발을 빌려주었던 인물의 눈높이까지 골판지를 감아올린 원추형 작품은 눈물이 그득 고인 우물을 연상시키고, 비닐을 쌓아올린 발자국은 무중력의 흔적처럼 보인다. 매우 미니멀적이지만 매우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_ 권영진 (미술사)
어떤 계기로 지금의 작업이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주제로 작업하고 계신가요.
그리움이라는 뜻을 가진 ‘戀’이란 한자를 좋아합니다. 글자의 모양새를 보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실로 꽁꽁 묶어놓은 상태입니다. 저에게 작업은 그렇게 마음 안에 담아둔, 언어로 표현되기엔 무르고 희미한 것들을 종이 위에 그리고 허공에 긋는 일입니다. ‘감기’작업이 시작될 때 즈음 저에게는 우리가 바라보는 지점에 관한 불편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일정하게 시력을 교정시켜주는 안경처럼 틀 안에 갇히는 관념을 넘어 근원적 상태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지속적인 물음이 자연스레 감기와 쌓기라는 반복적인 작업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상의 오브제(이름이 있는 사물들)를 틀로 삼아 골판지를 감아가고, 백여 명의 발 프린트를 수집하고 각각의 발 모양을 따라 비닐을 오려내고 쌓아가며 본연의 모습에 다가가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로(‘0’) 상태의 풍경에 가깝습니다. 감거나 쌓는,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행위와 행위의 대상이 되는 오브제, 그리고 축적되는 재료의 물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상이 점차 드러납니다. 작업은 시작부터 끝이 나는 긴 과정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또한, 3차원의 조각이 가지는 견고한 물질로서 공간을 가르고 점유하는 방식을 보다 유연하게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최초의 풍경에 대한 생각들은, 고정되지 않고 늘 모양을 변화하는 사막처럼, 흘러가는 바람과 구름 혹은 물결처럼 자연에 가까운 모습들로 보여 왔습니다. 조각이 가지는 공간과 회화가 가지는 서로 다른 공간의 영역을 넘나들려는 시도가 지속되었으며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수제 책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순간’을 길게 늘이어, 그 사이를 무한한 시간으로 펼치고 더듬어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작업도 해오고 있습니다.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들의 신체에서 작업의 단초를 발견한다고 하셨는데, 특히 ‘발’의 형태가 자주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람은 발로 땅(자연)과의 접점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한 발을 내딛는 다는 것, 두 발을 딛고 선다는 것은, 우리가 생을 이어가는 곳이 단지 발 밑의 땅의 면적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대지(자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재가 난 숲에서 가장 먼저 돋아나는 상추가 인체의 화상치료에도 효과가 있듯이, 살아있는 대지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급변하는 속도의 시대 속에서, 오직 인간의 지성만을 앞세우는 삶의 방식은 본연의 자연스러운 이치로부터 점차 멀어져 왔습니다. 옛 선조들의 지혜로움이란 자연과 함께하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었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저의 작업에서 발은 자연 일부로서의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수 년 전부터 해온 작업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발 프린트를 수집하고, 그 발바닥의 면적을 따라 0.8mm 두께의 투명한 비닐을 연차적으로 오려내고 쌓아가는 일입니다. 반복을 통해 처음의 명확하던 형상은 점점 모호해지다 마침내 사라지게 되고, 긴 노동의 시간 속에서 시선은 분별을 지우고 깊이의 풍경이 됩니다. 비닐의 겹이 수십, 수백 번 겹쳐지면서 아득한 푸른빛의 심연을 드러내고, 쌓아가는 방법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때로는 바람이 되기도 강이 되기도, 산이 되기도… 구름과 같은 풍경을 그려놓기도 합니다. 고정되지 않고 늘 변화하며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사막과도 같은 풍경들… 그것은 발이 그려놓는 ‘살아간다는 것’의 무늬입니다. 달빛, 바람, 밤, 별, 파도 같은 것들도 작업의 소재가 됩니다. 바람은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지며 다가오고 지나갑니다. 달은 저편에서 길의 끝으로 파도를 밀어내며 끝없이 우리에게 공명의 울림을 들려줍니다. 밤은 깊고 깊은 시간의 하늘을 내어주며 ‘지금’ 뒤로 흩어지는 시간을 거슬러, 잃어버린 처음의 얼굴을 그려보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에게 잊혀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비닐이나 골판지 같은 작업의 재료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설치 작업의 경우 형태를 정해놓고 작업이 시작되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물질과 공간에 대한 생각은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견고하고 물질성이 강한 소재보다 약하고 유연한 것들에 관심이 갑니다. 골판지와 비닐은 중성적인 재료이면서 투명함을 지니고 있어서 조각이 공간에 개입하는 방식을 보다 유연하게 합니다. 골판지는 부드러워서 오브제의 외각을 따라 감아나가기에 적합하면서도 그 단면에 구멍을 가지고 있어 빛과 수직으로 놓이게 되면 뒤편을 투명하게 비추게 됩니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물질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유연한 조각을 의미합니다. 또 비닐에는 아주 미세하게 청색 안료가 들어있어서 한 장일 때는 그저 투명하게 보이지만 수십 장이 중첩될수록 점차 푸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쌓는 과정의 긴 시간을 통해 투명하면서도 푸른빛의 조각이 만들어지면 심연이 깊이를 드러내게 됩니다.
비닐 작업을 시작할 때는 마음속의 어떤 느낌을 천천히 더듬어 따라가게 됩니다. 과정의 시간을 통해 자연스레 그 형상이 드러나게 되며 설치방식에 대한 생각도 점차 구체화됩니다. 개인전의 경우에는 시간을 두고 작업에 어울리는 공간을 찾기도 합니다. 공간이 먼저 결정되는 경우에는 공간을 거닐어보며 가장 적합한 설치방식과 규모를 고려하여 작업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작업과 공간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장 푸른 곳’ 드로잉이나 여러 설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푸른’이라는 색이 인상적입니다. 작업 속 푸른색의 의미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푸른색은 하늘빛으로도, 깊은 물빛으로도 우리 눈에 비치지만 다가가면 사라져버리고, 손을 뻗어 만질 수 없는 저편의 색채입니다. 우리 내면의 심연을 빛으로 표현한다면 푸른색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전, 신문을 보다 지붕의 처마까지 물이 차오른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홍수가 덮쳐 곳곳에 수해가 난 때였는데, 들어선 물은 애타는 삶의 소음을 메우고 깊이를 지우며 시 같은 풍경을 그려놓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며 자연의, 물의 무심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눈물이라는 것도 발끝부터 차오르다가 범람하는 홍수와 같습니다. 심연 속으로 모든 처연한 것들이 삼켜지면 무심하고 고요한 풍경이 됩니다. 발 모양을 따라 투명한 비닐이 오려지고 쌓일수록 푸른색은 짙어지고 심연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드로잉에서 보이는 푸른색은 ‘울트라마린’ 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감, 안료, 파스텔 등으로 그려진 것들입니다. 울트라마린은 ‘바다 저편’이라는 공간적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청색은 단순히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멀고 아득한 닿을 수 없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저편의 색으로 칠해진 자리는 그림의 표면을 넘어 무한한 공간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작업이나 드로잉들이 항상 어떤 풍경을 떠올립니다. 작업의 기초가 되거나 영감이 되어준 글이나 어떤 대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작업의 형태는 마음속의 무르고 희미한 느낌들을 섬세하게 더듬어가는 시간을 통해 서서히 물질로 드러납니다.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 가운데 흩어지지 않고 마음속을 떠도는 것들 가운데는 어떤 순간의 풍경도, 누군가와의 만남의 시간도, 책 속의 한 글귀로부터 생각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모네가 자신의 수첩에 적어놓은 ‘TOUT ARRIVE.’라는 글귀를 제 노트에도 적어두었습니다. ‘모든 것이 온다’, ‘모든 것이 간다’… 모든 것들의 순간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요즘 제가 하는 일들입니다. 일부러 멀리 찾지 않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잘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들이 잃어버린 순간순간의 경이로움과 맞닿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시 서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면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서울이 가지는 시간의 속도는 무척 빠르다고 생각됩니다. 반면 곳곳에 오랜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서울 속 옛 성곽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겨울을 버텨낸 대지에 봄이 찾아오고, 초록의 무성함이 잎을 떨굴 채비를 하는 가을의 메마른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때가오면, 가벼운 배낭을 메고 인왕산에서 북악산으로, 낙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 중에 창의문 근처의 백사실 계곡은 잊지 않고 들르는 곳입니다. 마치 먼 시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고요하고 깊은 숲 속에서 계절의 빛과 땅의 온기와 바람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인근 윤동주 시인이 거닐던 언덕을 걷는 것도 좋아합니다. 태고의 시간을 이어온 땅 위에서 머리가 아닌 발이 느끼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