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디게 가는 마을
기차에서 내려 담양행 시골 버스에 올라 탔을 때 옹기 종기 앉아있던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냈다. «-어디 가는거야? -저희 담양가요. -근디 가방이 와 이렇게 커. 딴 동네서 왔나본디? -네, 여기저기 여행하느라고요.» 우리는 어색함에 그저 실없이 웃었다. 꼬불꼬불한 시골 길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버스에는 안내 방송도 안나오고 딱히 정거장 이름이 적힌 지도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버스에 탄 마을 사람들이 먼저 살갑게 말을 걸어 친절하게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할머니는 신발까지 벗고 자기 안방인 마냥 다리를 쭉 뻗은 채 버스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누구보다 우정이 끈끈해 보이는 할머니 삼총사가 잠시 후에 버스에 타더니 그 모습을 보고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며 ‘여기서 이렇게 자면 어떻해? 어디가?’ 라며 말을 건낸다. 그 정겨운 풍경에 그저 웃음이 난다. 시골로 가는 여행길에서 우리가 기다렸던 것은 이런 따스함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담양에서도 죽녹원으로 유명한 담양읍이 아닌 슬로우 시티라고 불리는 더 작은 마을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보이는 풍경들 – 처음 와 본 이 새로운 장소에는 오래된 전통집들이 많아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잔잔하게 보이는 시골집들, 굽이굽이 길게 이어지는 좁은 돌담길 그리고 그 담 너머로 보이는 청색 기와 지붕들이 허공에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다. 정말 – 오랜만에 긴장감이 풀어졌다. 그리고 담장 너머로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낮은 건물들 사이를 한껏 감상에 젖어 걸었다. 바람에 흔들려 익지도 않은 채 떨어진 새파란 감들이 발등에 드문드문 차인다.
실로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난 우리는 여기저기 민박집 문을 두드리며 값이 싼 빈 방이 있는지 물어보러 다녀야 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머물기로 한 곳은 ‘매화나무집‘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정갈한 한옥집이다. 커다란 나무 대문을 열어주시는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간 ‘매화나무집‘에는 장독대로 가득찬 마당을 끼고 한옥 세 채가 곡선을 그리며 마주하고 있었다. 뭔가 살짝 어긋난 느낌, 조화롭지만 여유로운 느낌이다. «저희는 누룽지랑 짱아찌 반찬을 아침밥으로 내드려요. 그 방은 조금 작기는 하지만 이불 빨래는 깨끗하답니다.» 아침을 준다는 말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시리얼이 아닌 아침밥을 주는 곳이 어디 흔한가. 곧장 무거운 배낭을 방 안에 내려놓고는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움켜잡은 채 – 다시 마을 골목길로 나왔다.
슬로우시티는 굉장히 작은 마을이라서 어릴 때 명절마다 놀러가던 시골동네를 떠올렸다. 터-엉 비어있는 듯 별것 없는 구멍가게에서 졸고계신 할아버지, 드-문드-문 문을 연 초라한 시골식당, 집집마다 손으로 쓴 듯한 작은 간판들. 시간이 여유롭게 흘러가는 곳. 담양의 관광 명소인 – 항상 사람들로 넘치는 – ‘죽녹원’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슬로우 시티는 버스를 타야 이동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점이 좋더라.
근처에 맛있는 밥집이 있나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처음보는 마을 꼬마가 “안녕하세요”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다. 모르는 꼬마의 인사에 ‘사람을 잘못봤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걷다보니 다른 꼬마가 “안녕하세요”라며 또 인사를 건낸다. 하교시간 – 예의바른 꼬마들의 행렬은 그렇게 이어지고 우리는 단숨에 그 마을 사람이 된 마냥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식당 문은 열려있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주인이 없는 가게들이 많았다. 어쩔수 없이 꽤나 평범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시켰다. 여느 식당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갈한 반찬들이 벌써 빛깔부터 범상치 않아 보인다. 아, 밑반찬이 이렇게 맛있었나. 밥을 한 술 뜰 때마다 젓가락으로 어느 반찬을 집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죽순이 유명한 담양이여서인지 들깨로 버무린 죽순에 단맛이 배어있다. 너무 달지 않은 집 고추장, 고소한 깻잎무침 – 서울에 여느 맛있다는 밥집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신선하고 맛있다. 야채로 이렇게 다양한 음식맛을 낼 수 있구나 – 새삼스레 놀라며.
허름한 외관. 별로 기대하지 않고 들어간 식당에서 눈이 동그래질만큼 맛있는 식사를 했다.
담양에서 유명한 죽녹원과 소쇄원 산책 후 – 뜨거운 여름 날씨에 지쳐 낮잠을 자던 우리는 어둑해질 무렵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쉬-원한 밤 공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은은한 풀냄새, 점점 어두워지는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산책을 했다. 그 길이 그 길 같은데 굽어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재미난 시골집들이 많았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 이태리 같은 서양 도시들은 주로 커다란 길이 일자로 마을을 관통해 한 눈에 도시를 볼 수 있는 반면에 한국 시골길은 굽이굽이 곡선을 그려 한 눈에 마을을 볼 수있는 법이 없다. 조금씩 걸어나갈 때마다 숨겨져 있던 풍경이 얼굴을 내민다. 쿨한 할머니가 오래된 스쿠터를 타고 덜컹거리며 논 옆으로 달려 간다. 덜커엉- 덜커엉 – . 여기는 기계음도 무디다. 어떤 아저씨가 손짓을 해서 가보니 멀리 월봉산 꼭대기에 새하얀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아, 오늘이 보름인가봐.» 꽤나 기분좋은 우연에 발걸음을 멈췄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달이 위로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기와집 처마. 멀리 짙은 어둠을 머금은 마을 풍경이 산맥을 배경으로 또 다른 정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담양에서의 느긋했던 하루가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누룽지와 짱아찌 반찬을 담은 소반이 방 앞에 놓여있었다. 우리는 마당을 가득 채워 햇빛이 따사로운 오래된 한옥 마루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장독대를 마주보고. 누룽지 한수저에 짱아찌를 조그만치 올려놓고는 한 입 또 한 입 떠넣을 때마다 어릴 때 엄마가 아침 밥상에서 한수저씩 떠먹여주던 그 때가 떠올랐다. 짭짤한 짱아찌와 심심한듯 고소한 계란찜으로 소박하지만 맛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무딘듯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햇빛의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는 마루에 손바닥을 대고 있자니 그 온도가 몸으로 전해져서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