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 미술관에서 개최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은 서울에서 문화 영역을 중심으로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소규모 개인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기록하는 전시다. 전시 이름에 명명된 2005년이라는 해는 그런 소단위 조직으로 이루어진 작은 그래픽 사무소들의 활동이 드러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전시를 단순히 서울의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하는 아카이브전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데, 이름에 포함된 쉼표 ‘,’와 물결선 ‘~’으로 이어진 타이틀은 그런 불완전한 전시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대변해 준다. 개인의 취향으로 시작해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 된 소규모 그래픽 사무소들의 작업들을 모아 볼 수 있는 불완전한 아카이브 전시다.
“흔히 ‘소규모 스튜디오’라 불린 그들은 출판, 미술, 사진, 건축, 연극 등 인접 영역에서 활동하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물론 이전에도 작은 스튜디오는 있었고, 문화 영역에도 언제나 그래픽 디자인은 존재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2005년 무렵부터 소단위 조직은 디자인 기업의 대안으로서 더 적극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흔히 그런 스튜디오에서는 전시회 홍보물이나 인문 도서 같은 저예산 문화 영역 작업이 ‘상업적’ 정규 사업을 보완하거나 포트폴리오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자의건 타의건) 거의 유일한 활동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마이너’한 작업이 이전 시대보다 뚜렷한 가시성을 띠면서 디자인계와 문화 예술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정된 소수의 활동에 집중하는 데는 분명한 의의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해당 시기 서울의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한다고, 매끄럽게 말할 수는 없다. 전시 제목이 쉼표와 물결표로 다소 불안정하게 연결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_ 전시 소개 중에서
THE BOOK SOCIETY
“더 북 소사이어티는 미디어버스의 구정연과 임경용이 운영하는 서점이자 프로젝트 스페이스다. 더 북 소사이어티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 ‹불완전한 리스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회성 홍보 인쇄물을 주로 모으는 서재다. 전단, 엽서, 초청장, 소책자 등 홍보 인쇄물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장기간 소장되는 책은 물론 비교적 귀하게 수집되는 포스터와는 달리 일회적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탓에, 공식적 역사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런 일회성 인쇄물을 수집해 보존하는 서재는 자연스레 보완적 아카이브 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동 가능한 아카이브로 개발된 ‹불완전한 리스트›는 전시 이후 베이징을 거쳐 더 북 소사이어티에 영구 설치, 개방될 예정이다.”
EH
“IMG는 친근한 크기의 물체인 책을 납작하게 환원하고 거대하게 확대해 보여주는 사진 연작이다. 일반적으로 그래픽 디자인은 평면을 다룬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래픽 디자이너가 하는 작업이 순수한 2차원에서 머무는 일은 드물다. 책에는 두께와 무게와 재료의 특성이 있고, 웹 사이트나 동영상에는 시간의 차원이 있다. (…)
EH의 사진은 그래픽 디자인에 내제하는 3차원적 현실과 이상적 2차원 형태가 빚어내는 긴장을 포착 한다. 그는 하나의 카메라 위치를 극미하게 이동해 가며 때로는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이어붙여 하나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그 결과 육안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디테일을 드러내는 사진 속 사물은 거의 도표처럼 정확한 원근법을 보여주는데도 깊이가 철저히 사라진 평면, 물성을 잃어버린 순수 광학 현상으로 나타난다.”
CORNERS
코우너스(Corners)는 조효준, 김대웅이 2012년에 설립한 그래픽 디자인스튜디오로 시작해 김대순이 합류해 현재는 3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코우너스는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리소 인쇄소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아이덴티티, 웹, 인쇄 매체, 공간 여러 형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리소그라프(Risograph)는 마스터 용지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그 사이로 잉크가 통과되면서 인쇄되는 방식이다.
잠재문학실험실
잠재문학 실험실은 다섯 명의 디자이너의 작업에서 특정 지면을 선택해 시를 만든다. 지면을 채운 많은 페이지의 단어들에서 특정 단어만 고른 뒤 불필요한 남은 단어들은 Delect 키로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흔적을 남긴 채 삭제되어 진다. 그리고 선택되어진 단어들은 축출되어 원래의 텍스트에서는 흰 공백을 남긴 채 빠져나와 다시 한 편의 불완전한시가 되어 인쇄된다.
“잠재문학실험실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형성된 울리포 (OuLiPo : 잠재문학 실험실) 방식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작업 방식이다. 울리포는 프랑스 현대문학의 흐름 가운데서도 독특하고 주요한 실험적 움직임으로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울리포는 각종 ‘제약’을 문학의 도구로 삼았다. 문학에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등을 끌어들이며 일상적 기능에 속박되어 있던 문자를 제약을 통해 해방하고, 그 속에서 문학의 잠재성을 발굴해내려 했다. 이들의 손을 통해, 일견 창작을 방해하는 듯한 제약들은 그 명확한 규칙성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활용 가능한 무한한 창작 도구가 되었다.”
전시 참여 작가 : 길종상가, 김규호·임근준·조은지, 김성구, 더 북 소사이어티·테이블유니온·COM, 설계회사, 소원영, 옵티컬 레이스, 잠재문학실험실, 전은경·원승락, 코우너스·매뉴얼, EH, Sasa[44]·이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