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최진영씨의 그림에는 과연 낙서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가벼움이 있다. 그런데 그 가벼움이란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꼭 필요한 상큼한 종합비타민 같은 존재다. 작년 생일,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페이지 ‘건강에 좋은 낙서’에 그녀가 일기처럼 그려놓은 즐거운 낙서들이 소개된다. ‘술만 마시면 고양이가 되는 남자’, ‘양말 신은 양말’,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면모를 지닌 인물들이 느긋한 표정으로 일상을 흐트려 놓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너무 진지할 필요도, 완벽해질 이유도 없는 그녀만의 그림 속 세상.
풍정각
자전거 탄 풍경
숨었네. 찾았다!
식빵에 잼바르기
인터뷰
까이에 드 서울 : 진영씨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소개해주세요.
최진영 : 그림을 그릴 때는 메모를 자주해요. 뭘 그려야지 이렇게 생각해서 그리는게 아니라.. 제가 산책을 되게 좋아하는데 산책을 하면서 아니면 그냥 평상시에 문뜩 떠오르는걸 다 메모 해놔요. 그러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순간에 실타래를 풀어내듯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 같아요. ‘계란말이’를 메모해두고 계란에 말려있는 사람을 떠올린다던지, ‘숙면에 좋은’을 메모해두고 양이 백마리가 나오는 그림, ‘웨하스’를 적고 부서지기 쉬운 여자를 그려야지-하고 묵혀뒀다가 내킬 때 그립니다.
자몽 권하는 남자
산책은 주로 어디서 하세요?
외대 회기역 근처에서요. 회기역의 회짜가 돌아올 회짜래요. 回 [돌아올 회] 재밌죠? 예전에 친구가 말해줬는데 한 번 이 동네에 오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되고 못 나간데요. 그런데 별로 나갈 마음이 없어요. 동네에 있는 산 밑에 살거든요. 그래서 산책하기가 좋아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하게 되셨나요?
그림은 어릴 때 부터 그렸어요. 그런데 대학은 행정학과를 갔거든요. 가족이 모두 공무원이고 집이 좀 엄해서 부모님은 바로 공무원 준비 학원을 등록해주셨어요. 그런데 공무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서울은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웃음) 그래서 한 학기 다니다가 가출 했어요. 편지만 써 놓고 나가서 한동안 연락을 안 했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험을 다시 봐서 시각 디자인과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 때 서울은 다 최첨단일줄 알았는데 오자마자 반지하에 살기 시작했죠.
이 남자아이의 얼굴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건가요 ?
옛날에는 얼굴을 그리는게 정말 힘들었어요. 얼굴형만 많이 그려놓고 어떻게 눈 코 입을 그릴지 항상 망설였는데. 지금은 손에 잘 맞는 펜으로 거의 최소한만 그리다보니 미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 되더라고요. 아, 어디가 기원인지 생각났어요. 24살 때인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땐 언제나 미대생이라걸 어필하고픈...부자연스러움이 있었어요. 딱 봤을 때 그림 배운것 같은 부담스러운 필체의 그림으로 메뉴판을 그려놓고요. 그런데 카페 사장님이 개인 사정으로 아르바이트하던 저까지 통째로 가게를 양도해버린 거에요. (웃음) 새로운 사장님은 아주머니셨는데 토마토 주스를 개시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없을 때 메뉴판을 그려놓았어요. 토마토를 여러 개 그려놓고는 그 위에 선 세개로 웃는 표정을 그렸는데 그 자연스러움이 되게 좋았어요. 그 때의 토마토 얼굴에 점 몇 개가 추가 되어서 제 그림의 표정이 된 것 같아요. 뭔가 안정적인 눈, 코, 입을 찾았다는 생각? (웃음) 그 토마토가 충격적으로 귀여웠어요.
그림을 그릴 때 영감을 받는 소재가 있나요?
만화책, 동화책을 좋아하고 길게 집중을 못하는 편이라 단편소설을 좋아합니다. 책을 보면서 낙서할 때도 많아요. 책을 더럽게 보는 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현실에 있을 법한 복합적인 인물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교훈적인 인물보단 진상을 피우는 인물들과 애매한 결말을 (영화에서는..) 좋아합니다. 혼자 다닐 때가 많은데 혼자 밥을 먹을 때, 카페에 있을 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 구경할때 남들이 나누는 아주 구체적인 대화를 작업하는 척 하면서 엿듣는 걸 좋아합니다. 어쩔땐 대화가 시트콤처럼 잘 들려서 꼭 그려야지! 하고 메모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증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근거있게 느껴지는 것들. 직감이나 사주. 손금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에 좋은 그림’이라는 페이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나요?
페이지는 작년 생일에 만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홀가분해지고 싶기도 했는데 그 반작용인지 ‘그림을 어딘가에라도 해야지 해야지’ 하는 기분은 있어서 생일 날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의미부여를 하며 만들었습니다. ‘완성한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도 걸리고 그리면서 감정기복의 영향도 많이 받아서 그려놓고 부끄러워할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러기에는 생각들이 낙서인 상태로 쌓이거나 버려져서 좀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제 건강에 좋으려고 만든) ‘건강에 좋은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아빠 친구분이 ” @@씨 따님이시죠” 하면서 말을 걸어 온 것.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그려달라는 애교있는 요청을 받는것. 악플까지는 아니고 따가운 댓글을 남겼다가 지운 분이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서 자기가 악플을 달았다며 사과를 했던 일.. 남자인줄 알았는데 실망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림 스타일이 바뀌기도 했나요?
예전에는 동경하는 스타일의 그림을 그저 따라해보던 시기도 있었고, 의미없이 뺵빽한 그림도 그렸어요. 그림 스타일이 있었다기보단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그릴 때가 많았어요. 일로써가 아니라 생각을 흘려 보내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더라고요. 차차 편한 펜이나 노트도 생기고. 몸에 맞는걸 찾아가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어떤 것을 그려야 멋있을까, 어떤 질감을 써야 실제보다 멋져보일까 이런 생각을 먼저 했거든요. 요즘은 그리고 싶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고 금방 그려내야지 하다보니 거기에 맞는 그림체가 생겼어요. 지금은 그냥 그리고 싶은 것을 여기 저기에 편하게 그리고 있어요. 대상을 정하지 않고 그려서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게 그린 그림은 기분이 좋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분 좋게 그려서 바로 찍어 올렸을 때 그 느낌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 같아요.
맛 쪼은걸 전시에 대해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예전에는 맥주 달력 같이 야한 소재로 달력이 나왔었잖아요. 그런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생각해서 시작하게 된거에요. 달마다 계절감에 맞게 그림을 그렸는데 저는 짝 수 달 일러스트를 그렸어요.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는 걸’, ‘신나는걸’. 8월이면 돌고래를 그려놓고 ‘조련하는 걸’ 이런식으로 다 ‘걸’로 끝나는 시리즈였어요.
말 장난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네. 요즘에는 속담 같은 것도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은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니까. 재미있는 말이 있으면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그림을 그리는게 재밌는 것 같아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약에 쓰려는데 정말 있었을때의 난감한 상황을 그린적이 있어요. 새우젓을 새우젖으로 표기하는 실수라던지.. 옛 말 틀린것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옛 말들이 들어맞지 않는 상황을 그려보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소통’ ,’진정성’, ‘감성적인’ ‘한국적인’ 이런 막연하게 쓰이는 단어들도 재미있어요.
그늘진 얼굴
집이 엄했다고 들었는데 진영씨는 그 유머와 넘치는 흥의 출처는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집에 엄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성적이라는게 확실히 숫자로 기록되어 나올 때 부터라.. (성적표 등수를 칼로 긁어내서 복사해 갖다드린 적도 많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어요. 지루하지만 자유롭고 방치된 생활이였는데 주목 받는걸 참 좋아했습니다.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오버한 사진들이 많아요. 아홉살 때 도시로 전학 온 이후부터는 너무 존재감이 희미해져서 도시 친구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 또는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유머를 연마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교양수업에서 유머가 자기방어의 한 방법이라는걸 보고는 맘 속 깊이 동의했습니다.
정말 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요?
작은 책을 꾸준히 만들고 싶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지극히 개인적 욕구에서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책임감과 부끄러움도 있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한 단어들이 가진 리듬감이 너무 좋아서 적어내려가 보다가.. 꿀, 풀, 물, 불, 술, 팔, 밤, 눈, 벌, 양, 빵… 등등. 꽤 많습니다! 한 글자들의 단순한 리듬과 낙서의 단순함이 어울리는 느낌이라 어린이나 어른들 구분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단어장 같은걸 만들면 어떨까…일단 그려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고 무거운 형태의 책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것 들을 차례차례 시험해보고 싶어요. 요즘은 자주 보기 힘든 넘기면 촤라라라 애니메이션이 되는 플립 북이라던지 포켓이 쏙 들어가는 엉큼한 내용의 만화책도 만들어보고 싶고 느리지만 흐름을 가지고 역시 스스로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 십 년 수 백 년 뒤에 누가 나중에 수집해 볼만한 것 들이면 재밌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장? (웃음) 저 시장 되게 좋아하거든요. 시장을 떠올리면 익숙한 풍경일 것 같은데 같은 시장을 가도 갈 때마다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뭔가 정겨우면서 낯설면서 편안하면서 어지러우면서 난잡하면서. 시장통 같은.